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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지리도십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887
한자 善山地理圖十絶
영어의미역 10Poetry of Seonsanjirido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한시|칠언 고시
작가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창작연도/발표연도 조선 전기

[정의]

조선 전기 구미 지역에서 활동한 김종직이 윤료의 「선산지리도」에 덧붙인 한시.

[개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선산지리도십절」은 『점필재집(佔畢齋集)』 제13권 시편에 실려 있다.

김종직의 『점필재집』제1권~제23권에는 각체(各體)의 시가 저작 연대순으로 되어 있으며, 각 권에는 대략 40~60제(題)의 시가 실려 있어 모두 1,076제(題)나 된다. 이처럼 『점필재집(佔畢齋集)』의 대부분이 시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종직이 시문에 주력한 문장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종직이 윤료가 그린 지도에 제(題)한 시가 두 편인데 그중 하나가 『점필재집』권8에 “윤료가 또 「함양군지도」를 제작하였기에 그 위에 절구 아홉 수를 쓰다(佔畢齋集卷之八 詩 允了又作咸陽郡地圖 題其上 九絶)”이라는 제(題)가 붙은 시이고, 다른 하나가 “윤료가 「선산지리도」를 만들었으므로, 그 위에 절구 열 수를 쓰다(允了作善山地理圖 題十絶其上).”라는 제(題)가 붙은 「선산지리도십절」이다. 앞의 것은 설명이 없으나 「선산지리도십절」은 특정 인물과 지명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구성]

「선산지리도십절」은 전체 열 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수마다 인용된 지명과 인물에 대한 설명을 더하였다.

[내용]

“윤료가 「선산지리도」를 만들었으므로, 그 위에 절구 열 수를 쓰다(允了作善山地理圖 題十絶其上).”이라는 제하(題下)의 시는 다음과 같다.

제1수

옛집의 높은 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으니/ 태수는 응당 먼저 이문에서 내리리라/ 반은 벼슬아치이고 반은 아전들이었으니/ 순충공의 후손이 몇 대나 내려왔는고 (故家喬木至今存 太守應先下里門 半是簪纓半刀筆 順忠公後幾雲孫).

- 대광(大匡) 김선궁(金宣弓)은 시호가 순충인데,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다. 부(府)의 사족(士族) 및 향리(鄕吏)로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김선궁의 후손이다.

제2수

물불 같다 지목된 자가 바로 견왕이었지만/ 인의가 끝내는 능히 사방을 평정하였네/ 산중에 말 타고 전쟁한 흔적 찾아보니/ 바위틈 꽃과 시냇가 풀이 향기를 풍기누나 (指爲水火是甄王 仁義終能定四方 試覓山中盤馬處 巖花澗草發天香).”

- 부의 동쪽 십 리쯤에 태조산(太祖山)이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견훤(甄萱)을 맞아 싸울 적에 주필(駐蹕)한 곳이라 한다.

제3수

도리산 앞에는 도리의 꽃들이 피었는데/ 묵호자는 이미 떠나고 도사가 왔도다/ 신라의 빛나는 왕업을 누가 알리오/ 끝내는 모랑의 움 속의 재가 되어 버렸네 (桃李山前桃李開 墨胡已去道師來 誰知焃焃新羅業 終是毛郞窨裏灰)

- 도리사(桃李寺)는 부의 동쪽 십오 리쯤에 있다. 신라 때에 승려 묵호자가 부의 도개부곡(道開部曲) 모례(毛禮)의 집에 오자 모례가 움집을 만들어 묵호자를 받들었다. 묵호자가 죽자 아도(阿道)라는 자가 또 모례의 집에 왔으므로 모례는 또한 아도묵호자처럼 받들었다. 그런데 아도가 일찍이 동도(東都)에 갔다 돌아와서는 겨울철인데도 산 앞에 복사꽃·오얏꽃이 성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절을 지어 살면서 마침내 도리사라 이름 지었으니, 이것이 신라시대 불법(佛法)의 시초인 것이다.

제4수

이후가 쌓은 성이 천시를 얻었는지라/ 왜구의 무력한 넋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네/ 물어보자 남은 사당이 어느 곳에 있느뇨/ 허물어진 성에 가을 풀만 절로 우거졌구나 (李侯板築得天時 海寇遊魂不敢窺 爲問遺祠在何處 壞城秋草自離離)

- 고려 말기에 왜병이 주(州)에 침입하자, 지주사(知州事) 이득신(李得辰)이 성을 쌓아 그들을 방어하였으므로, 읍인(邑人)들이 이를 은덕으로 여겨 사당을 세워 향사했는데 지금은 폐해졌다.

제5수

죽장암 가에는 고목들이 빽빽이 서 있는데/ 석반은 아직도 수성단을 누르고 있네/ 성신이 오늘도 남극성에 빛나니/ 변방인들이 장차 손으로 가리키며 보리라 (竹杖菴邊古樹攢 石槃猶鎭壽星壇 聖神今日輝南極 負海人將指點看)

- 부의 서쪽 오 리쯤에 죽장사(竹杖寺)가 있는데, 고려 때에 여기에서 남극 노인성(南極 老人星)에 제사하였다.

제6수

오산과 봉수를 이리저리 마음껏 거니노라니/ 야은의 맑은 바람 말하면 다시 길어지네/ 밥 짓는 계집종도 시 읊으며 절구질하니/ 지금도 사람들이 정공향에 비유한다오 (烏山鳳水恣倘佯 冶隱淸風說更長 爨婢亦能詩相杵 至今人比鄭公鄕)

- 길재(吉再)금오산(金烏山) 봉계동(鳳溪洞)에 은거하였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길재의 가비(家婢)들도 곡식을 찧을 때에 또한 시사(詩詞)로써 절구질을 했다고 한다.

제7수

마을 사람이 예로부터 학교를 중히 여기어/ 뛰어난 인재들을 해마다 조정에 바치었네/ 성 서쪽에 자리 잡은 조그만 마을 영봉리를/ 학도들은 아직도 장원방이라 말하누나 (鄕人從古重膠庠 翹楚年年貢舜廊 一片城西迎鳳里 靑衿猶說壯元坊)

- 영봉리는 서문(西門) 밖에 있는데, 전가식(田可植)·정지담(鄭之澹)·하위지(河緯地)가 모두 장원을 했었다.

제8수

아득한 넓은 바다에 자색 봉황이 날아가니/ 팔 년 동안을 외로운 등잔 벗 삼아 살았도다/ 돌아와 시험 삼아 거울 가져다 비추어 보니/ 뺨 위에 붉은 놀이 반쯤이나 엉기었구나 (滄海茫茫紫鳳騰 八年生理只孤燈 歸來試把菱花照 臉上丹霞一半凝)

- 봉계(鳳溪)에 이름이 약가(藥加)라는 열녀(烈女)가 있었는데, 그의 남편이 왜인(倭人)에게 잡혀갔다. 약가는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무릇 팔 년 동안이나 고기를 먹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자곤 하다가 끝내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자 다시 부부(夫婦)가 되었다.

제9수

일본의 사신이 매양 배 타고 올 때마다/ 십 리까지 잔치 마련해 송영하기 관례로세/ 성명한 임금의 성교가 멀리 미침을 힘입어/ 고을 원이 자주 월파정을 오른다오(扶桑使者每楊舲 十里樽牢慣送迎 賴是聖明聲敎遠 遨頭頻上月波亭)

- 월파정은 부의 동쪽 십 리쯤 되는 여차진(餘次津) 가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오는 일본의 사신에 대해서는 본부에서 반드시 여기에서 잔치를 베푼다.

제10수

보천탄 위에는 장삿배들이 모여들어/ 일천 가호 집집마다 소금을 먹게 되었네/ 누가 백성에게 착취하여 영리를 꾀하는고/ 예로부터 청렴한 장관이 드물었다오(寶泉灘上集商帆 千室人人食有鹽 誰要脂膏營什一 古來長吏罕能廉)

- 보천탄은 해평현(海平縣) 서쪽 오 리쯤에 있는데, 바다의 장사치들이 봄가을마다 이곳에 배를 대고서 물건을 팔아 가지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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