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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0922
한자 仁同戰鬪
영어의미역 Indong Comba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대일본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592년 9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2년 9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
관련인물/단체 장사진|장사규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

[역사적 배경]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의 군위현조에 이보의 약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 인동현감으로 재임하면서 당시 인동은 왜구의 중요 통로가 되어 왜구의 피해가 특별히 심하여 전야(田野)가 비었고 사는 사람이 없는지라 관찰사가 논계하여 읍을 혁신하고 공으로써 임시 현감을 차임하고 또 과곡관을 겸임하니 추절을 당하여 득곡함이 심히 많았다”고 적혀 있듯이, 왜구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곳이 인동이었다.

[발단]

인동 출신으로 군위 효령에 잠시 있으면서 군위현의 향교 교생으로 있던 장사진(張士珍)은 고향인 인동에 왜적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위 및 인동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훈련하고 군기와 군량을 정비하여 군대의 위엄을 떨쳤다. 이때 왜적은 1592년 9월 17일 전라도의 무주부와 금산군에서 군사를 철수하여 경상도의 김산현으로 집결하였다.

인동현에는 대구부에 본진을 두고 있던 적군 기노시타 시게가타[木下重賢]의 군사 800명, 난죠 모토키요[南條元淸]의 군사 1,500여 명이 인동읍에 주둔하여 인근 고을인 군위 경계까지 침범하여 약탈과 살인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의병장 장사진은 때때로 인동까지 출격하여 많은 적을 격멸하였다. 장사진은 항상 전투의 선두에 서서 몸소 적진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의병들의 사기가 날로 높아지고 적에게 부역하는 자가 차츰 없어지게 되어 고을의 신망이 두터워져 많은 의병들이 따르게 되었다.

장사진의 동생인 장사규도 그와 비슷하여 날래고 용감하여 담략이 있었는데 어느 날 급히 출동하여 적을 치고 추격하던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장사진은 이에 더욱 분격하여 고을 안에 적의 그림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곧 뛰어 나가서 격멸하고 반드시 이기니 적은 그의 이름만 듣고도 멀리 도망쳤다.

[경과]

9월 20일 수백 명의 적이 인동에 진을 치고 있는 장사진의 본진으로 쳐들어 왔는데, 이때 그는 다만 수십 명의 정병을 거느린 채로 곧 역습을 단행하였다. 번쩍이는 대검을 단번에 휘둘러 적장의 목을 베어서 큰 창끝에 목을 꿰어 들고 춤을 추면서 적에게 보이자 적병들이 도망치니 제1차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9월 30일 제2차 전투에는 적이 더욱 많은 병력으로 쳐들어와 지난 20일 전투의 보복을 하고 장사진 한 사람만은 기어코 사로잡아 죽이려는 계략을 꾸며 복병을 만들어 놓고 그를 유도하였다. 이 흉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달아나는 적을 뒤쫓다가 마침내 복병을 만나 포위되었다.

이에 그는 좌우의 군사들에게 “이제 우리가 끝까지 싸워서 남아의 의기를 높일 때가 왔으니 구차스럽게 살지 말고 적 한 놈이라도 더 죽이자”고 하며 모두 이를 악물고 싸웠다.

평소 적은 장사진의 용맹을 두려워하여 장장군이라고 부르던 터라 감히 가까이 다가서는 자가 없었고, 멀리서 포위한 채로 활과 조총만 쏘아대니 장사진은 말을 채찍질하여 십여 기와 함께 적의 중견을 돌격하는데 화살이 빗발 같고 총탄이 우박 같았으므로 화살을 받지 않은 인마가 없었으며 조총에 맞지 않은 장병이 없었다.

[결과]

돌격전을 세 차례나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모두 쓰러져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장사진은 돌연히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복병을 만나 한 팔을 잃고 한 팔로 분격하면서 적병이 그의 옆에 다가오자 일단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적 두 사람의 목을 베고는 피를 흘리며 장렬히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적병들이 크게 놀라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으나 적 가운데 사상자가 많았다.

장사진의 전사하던 모습을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서는 “적으로부터 한 팔을 끊겼으나 한 팔로 분격하였다” 하였고,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는 “앞뒤로 적에게 포위되어 좌편으로 치고 우편으로 항거하다가 힘을 다하여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조정에서는 장사진의 용전을 기려 절충장군(折衝將軍)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추증하였다.

[의의와 평가]

적은 인동에서 1, 2차 전투 이후 감히 경솔하게 출략하지 못하고 고수방어에만 전념하고 인동과 군위 지역의 백성들이 잠시나마 안거낙업하였으니 이는 장사진의 의병활동에 많은 공덕이 있었다. 인동 부근의 왜적과의 전투는 이 두 차례만이 아니고 그의 동생 장사규가 전사하던 싸움을 비롯하여 임진년 6~11월과 장사진이 전사한 뒤에도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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