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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1453
한자 金東錫
영어음역 Gim Dongseok
이칭/별칭 매암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영봉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교육자|정치가
출신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영봉리지도보기
성별
생년 1903년연표보기
몰년 1966년연표보기
본관 일선
대표경력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 이사|제4대 국회의원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동석(金東錫)은 호가 매암(梅巖)이며, 순충공(順忠公) 김선궁(金宣弓)의 32세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장사랑 김지복(金志複)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호조참판 김기열(金基烈)이다. 할아버지는 숭인전참봉 김진규(金鎭奎)이며, 아버지는 농산중추원참의관 김희수(金熙洙)이며, 어머니는 단양장씨(丹陽張氏) 장옥선(張玉善)이다.

[활동사항]

김동석은 대구협성학원을 중퇴하고 1917년 동경제일외국어학교 중등과에 입학하여 1919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청소년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20년에 진영학원(進永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화원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청년 교육과 청년 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9월 대구에서 방한상(方漢相), 신재모(申宰模), 정명준(鄭命俊) 등과 무정부주의 연구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였으며, 무정부주의 구현을 위해 일본의 여러 단체와 제휴하여 공동 노선을 추구하였다. 1926년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제일외국어학교 본과에 입학했으나, 1926년 7월 진우연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1927년 6월 14일 대구재판소에서 하종진(河鍾璡), 안달득(安達得), 마명(馬明), 우해룡(禹海龍)과 함께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에 고향인 선산 장천으로 돌아와 양조장 서기로 취직하였으며, 1929년에 선산군 양조업자 조합장에 피선되었으며, 1930년에는 장천금융조합장으로 선임되어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에 조선민보사 장천지국을 맡기도 하였으며, 1936년 9월에는 선산약주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양조업에 종사하면서도 김천청년동맹, 금릉학원(金陵學院) 등과 같은 사회·교육 활동에 매진하였고, 임시정부 군자금 송금, 비밀 잡지 『근우(槿友)』의 간행 등과 같은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에 국가의 장래를 위해 교육이 급선무임을 강조하고 오상학원(五常學院) 설립에 전력을 기울였다. 1945년 4월 1일 오상중학교를 개교하였으며, 1951년 9월 1일 오상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오상중학교·오상고등학교 교장과 오상교육재단 이사장, 대한민국교육연합회 경상북도 대의원과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 이사 등을 지냈다. 말년에는 정치에 투신하여 1958년에 제4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으나, 1961년 4·19혁명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상훈과 추모]

1947년 10월 10일 교육 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교육공로자 표창장을 수여받았으며, 1951년에는 대한민국 교육공로상을 수상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상장리에 있다. 일대기를 새긴 묘비명은 1985년 8월 15일 김동리(金東里)가 짓고 동강(東江) 조수호(趙守鎬)가 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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