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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유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817
한자 採薇亭由來
영어의미역 Origin of Chaemijeong Pavilio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해평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광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지명유래담|정자건립담
주요 등장인물 길재
관련지명 채미정|수양산|금오산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길재의 충절|길재를 기리는 사람들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해평면에서 채미정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채미정은 1986년 10월 15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2호로 변경되었다. 고려 후기의 충신이자 학자인 길재(1353~1419)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 채미정을 건립하였다. 길재의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鰲山人)이다. 길재이색·정몽주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성균관 박사가 되어 유생들을 가르쳤다. 저서에 『야은집(冶隱集)』과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채록/수집상황]

198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출간한 『한국구비문학대계』 구미시·선산군 편과 2000년 구미문화원에서 출간한 『구미시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길재금오산으로 피신 와 숨어 살았는데 후배들이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채미정을 세웠다 한다. 전하는 문헌에 의하면 조선 영조길재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관민이 뜻을 모아 정자를 짓고 채미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채미정이란 이름은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 먹다 굶어 죽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모티프 분석]

「채미정 유래」의 주요 모티프는 ‘길재의 충절’과 ‘길재를 기리는 사람들’이다. 길재의 충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채미정을 세웠다는 정자건립담이자 백이와 숙제에 관한 고사에 연유하여 채미정이라 이름 지었다는 지명유래담이다. 채미정이란 이름은 결국 길재의 충절이 백이·숙제에 비견할 만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채미정 유래」는 조선 건국에 반대한 고려 유신 72명이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조선왕조에 반대하자 태조 이성계가 두문동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 고려 충신들을 몰살한 두문동 사건이 있은 후 길재가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에 은거해 살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채미정은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충절을 보여 준 길재와 걸맞은 명칭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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