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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02971
영어의미역 Traditional Korean Narrative Song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석배

[정의]

경상북도 구미 지역 출신 명창이 부르거나 구미 지역에서 불리고 있는 창악(唱樂).

[개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가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唱]와 아니리[白]로 엮어 발림(너름새)을 곁들이며 구연(口演)하는 창악적 구비서사시(口碑敍事詩)이다. 12마당이 전해 왔는데 현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5마당이 전한다. 구미 지역은 동편제권으로 이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판소리는 박록주 명창이 새로 짠 박록주제 「흥보가」이다.

[변천]

대구·경북 지역 사람들은 흔히 판소리를 호남 지역의 예술로만 생각하고 판소리와 무관한 곳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구·경북은 조선시대에 판소리 명창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판소리의 그 젓갈 같은 맛과 수석(壽石) 같은 멋을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귀 명창이 많았던 판소리 고장이었다. 전주대사습에서 장원한 명창도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에서 소리하여 인정받아야만 비로소 서울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는 말은 이러한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경상감영 선화당에서 벌어진 소리판에서 있었던 판소리 명창들의 일화는 대구·경북 지역의 판소리 문화가 어떠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훗날 가왕(歌王)으로 칭송받았던 송흥록(宋興祿)이 소리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와서 명성이 자자하자 경상감영에 불려가 소리를 하게 되었다. 명창이란 칭찬이 만좌에 넘쳤으나 일등 명기 맹렬(孟烈)의 입에서는 한 마디 평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대의 소리가 명창은 명창이나 아직도 미진한 대목이 있으니 피를 세 동이는 더 토하여야 비로소 참 명창이 되리라.”고 일침을 가하였다.

송흥록은 고향인 운봉 비전으로 돌아와 폭포 밑에서 석 달 동안 죽자고 소리 공부를 하여 서너 동이의 검붉은 선지피를 토한 끝에 득음(得音)하고 난 후 다시 경상감영 선화당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다. 마침내 맹렬은 송흥록의 소리에 반해 그를 따라 운봉으로 가서 함께 살았다. 고수관(1764~1843 이후) 명창의 일화도 판소리사에서 기억할 만한 것이다. 고수관은 다른 광대에 비해 글재주가 있고 임기응변에 능해서 소리판의 서화(書畵)나 기타 광경을 적절하게 만들어 불러 놀라게 했다. 한 번은 경상감사 도임 잔치에 불려가서 「춘향가」의 기생점고 대목을 부르게 되었는데, 「춘향가」 사설에 나오는 기생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 날 잔치에 참석한 수많은 기생들의 이름에 어울리는 멋진 사설을 붙여 좌석을 경탄케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크고 작은 소리판이 더 자주 열렸다. 1929년 대구극장에서 김창환, 정정렬 두 대명창의 찬조 출연 아래 김여란이 데뷔 공연을 하였고, 1932년 2월 2일부터 3일간 대구공회당(현 대구시민회관)에서 김창환, 정정렬, 한성준 등 전통 예술계의 원로들이 조선 음률을 부활시키려는 목적으로 창립한 조선악정회(朝鮮樂正會)의 발대식으로 대연주회를 연 것도 이 지역의 판소리 예술에 대한 애호의 정도를 웅변하고 있다.

구한말 가선(歌仙)으로 칭송받던 동편제의 마지막 종장(宗匠) 박기홍과 그의 제자 조학진·정춘풍의 지침을 받아 이름을 날린 유성준, 그리고 김창환의 수제자 박지홍 등이 이 지역에서 활동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혼불로 우리 지역의 판소리 토양을 비옥하게 가꾸었고, 조학진과 박지홍은 이곳에 소리뼈마저 묻었다.

이들이 텃밭에 뿌린 씨앗은 튼실하게 자라서 판소리 숲을 거느린 낙락장송으로 우뚝 섰다. 지금은 소리로만 살아 있지만, 한 시대의 소리판을 풍미했던 판소리의 강소춘, 김초향과 김소향 자매, 김추월, 김녹주, 신금홍, 박록주, 이소향, 임소향, 박소춘 그리고 가야금 병창의 박귀희가 바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배출되거나 활동한 명창들이다.

[내용]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는 동편제 소리 문화권이다. 일제시대 때 임방울(1905~1961) 명창이 대구 부호의 초청을 받아 왔다가 수모를 겪고 돌아간 일화가 전한다. 임방울이 단가 「편시춘」으로 목을 풀기 시작하자마자 좌상(座上)인 부호가 소리를 그치게 하면서 “단가에 질질 짜는 계면이 뭐꼬? 그게 단간가?”하고 질책하면서 “어릴 적에 박기홍 명창의 소리를 들었는데 단가만 들어도 씩씩한 성음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며 “단가는 그만 두고 판소리나 듣자”고 하자 임방울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판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경상도 사람들은 ‘질질 짜고 늘어지는’ 서편 소리보다는 쇳소리 같은 철성으로 ‘쇠망치를 내려치듯 소리를 끊어내는’ 동편 소리를 선호했다. 영남 지방에서 동편제 소리가 더 선호된 것은 동편제의 힘찬 성음 구성과 분명하게 분절되는 장단 등이 창출하는 소리 맛이 이 지역 사람들의 기질과 맞아 떨어지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록주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박기홍 명창에게 두 달 동안 「춘향가」 전 바탕과 「심청가」 일부를 배워 동편제 소리의 기틀을 닦는 한편으로 예술인이 가져야 할 자세도 배웠다. 박록주의 첫 스승인 박기홍은 동편제의 법통을 혼자 두 손바닥 위에 받들어 들고 끝판을 막다시피 한 종장(宗匠)이요, 가신(歌神)·가선(歌仙)이라는 평을 받던 절세의 명창으로 일찍이 대원군고종의 두터운 총애를 입어 참봉의 직계를 받았다.

그는 소리하기에 앞서 소리금을 정하고 소리하였을 정도로 예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하였고, 죽어도 비굴하게 살지 않는다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시 선산군수가 박기홍이 인사를 오지 않자 괘씸하게 여겨 오만한 버릇을 고치려고 박기홍을 불러서 소리를 시켰는데 트집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적벽가」의 관운장의 호통 소리에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오히려 망신만 당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하고 있다.

박록주는 1931년 남원의 주천에 있는 김정문 명창을 찾아가 「흥보가」 한 바탕을 체계적으로 다시 배웠다. 김정문은 당대 동편제의 최고봉인 송만갑 명창의 수제자로 이름을 날리던 명창이다. 박록주는 훗날 김정문에게 배운 이 동편제 「흥보가」의 지나치게 골계적인 부분을 삭제하는 한편 김창환 명창의 ‘제비노정기’, 백점봉의 ‘비단 타령’ 등의 더늠을 수용하여 자신의 개성에 맞는 「흥보가」를 만들었다.

[현황]

현재 적지 않은 소리꾼들이 박록주제 「흥보가」를 장기로 부르고 있다. 박록주제 「흥보가」로 2002년에 박송희 명창과 한농선 명창이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기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6년에는 정순임 명창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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