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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리 문화재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230018
한자 一善里文化財-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88년 7월 1일연표보기 - 경상북도 선산군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마을 형성
변천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경상북도 선산군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 마을에서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마을로 개칭
현 주소 일선리 문화재마을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성격 집성촌
면적 0.40㎢
가구수 81가구
인구[남/여] 191명[남 98명, 여 93명]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있는 전주 유씨 집성촌.

[개설]

일선리 문화재마을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살던 전주 유씨(全州柳氏)들이 임하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자 집단으로 이주하여 만든 현대식 집성촌이다.

[명칭 유래]

일선리(一善里)는 신라 시대 선산군의 지명이다. 안동에서 살던 집과 누정 일부를 그대로 이건하여 집을 지은 까닭에 일선리 문화재마을이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1980년대 초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에 다목적 댐인 임하댐 건설이 정해지자 당시 수몰 지역으로 내정된 수곡리 일대에 살던 사람들의 거처가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당국에서는 선산군의 도개면 신림리와 해평면 낙산리 경계선에 놓여 있던 밭과 야산을 정비하고 1987년 해당 지역 사람들을 이주하게 하였고, 1988년 7월 1일 「선산군 조례」제1042호에 따라 해평면 일선리로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다. 당시 마을 앞 낙동강 강변 유휴지 83만 2000㎡를 농지로 조성하여 이주한 주민들에게 8,000㎡씩 분양하였다. 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되며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문화재마을이 되었다.

[현황]

구미시 선산읍에서 상주시로 연결되는 국도 33호선을 따라가다 선산읍 생곡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낙동강에 놓인 일선교를 건너 직진하면 오른쪽에 보이는 첫 번째 마을이 일선리 문화재마을이다. 마을 앞 도로변에 ‘일선리 문화재마을’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세워져 있다. 마을 어귀 중앙에 4m가량 높이로 우뚝 솟은 ‘수류우향(水柳寓鄕)’ 비석에 새겨진 글이 마을이 생겨난 배경을 알려 준다. 비문에는 “우리 전주 유씨는 여초(麗初) 대승공(大丞公) 휘(諱) 차달(車達)의 후(後)로서… 안동 수곡에 400여 년 세거해 오다가 임하댐 건설로 수몰이 되어 70여 호가 이곳으로 내주(來住)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에는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가 10여 점이나 있다.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문화재도 함께 옮겨 왔기 때문이다. 용와 종택 및 침간정(傭窩宗宅枕澗亭)[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호]은 조선 숙종(肅宗)영조(英祖) 때 학자인 유승현(柳升鉉)[1680~1746]이 살던 집과 학문을 가르치던 정자로 구성돼 있다. 삼가정(三檟亭)[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0호]은 유봉시(柳奉侍)[1654~1709]가 두 아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학덕을 갖춰 높은 관직에 이르자 정자를 짓고 세 그루의 가죽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임하댁(臨河宅)[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3호]은 유승현의 후손이 지은 집이다.

그 외에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1호인 수남위 종택(水南位宗宅),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4호인 대야정(大埜亭),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5호인 근암 고택(近庵古宅),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7호인 호고와종택(好古窩宗宅),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8호인 만령초당(萬嶺草堂),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62호인 동암정(東巖亭) 등이 있다.

일선리 문화재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정월 초엿새면 어김없이 고향에 있는 기양 서원(起陽書院)을 찾아 배알하고 문중 회의에도 참석한다. 또 음력 10월 초하루에는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 문중 재실에 모여 시제를 올리는 등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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